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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산문집책이 묵직하다. 가끔 내용도 묵직하지만 그보다는 책 자체가 좀 무겁다. 사진이 가끔 있는데, 어쨌든 좀 괜찮은 종이를 사용했나보다.이 책은 "오래전부터 나는 국경을 꿈꿨다. 왜냐하면 나는 국경이 없는 존재니까. 내게 국경이란 곧 바다를 뜻했다." (p.11)로 시작한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국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적인 국경과 문학적인 국경. 작가가 처음 글을 쓴 시점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제 국경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세력의 반대만 아니라면, 어쩌면 바다와 하늘을 통하지 않고 육지로 국경을 넘어 저 멀리 유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기차를 타는 것이 몸은 힘들겠지만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세계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그런 기회가 바로 저기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우리는 국경이라는 것을 조만간 아니면 몇 년내에 체험할 수 있을까? 책의 2/3 정도는 어렵지 않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행지에서의 겪은 일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은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다른 소설들에 녹아들어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게 된다.예를 들어, "나와 신국판과 멸치 사이에 흐른, 그 참으로 오랜 침묵" 편을 읽으면서 잠깐 <나는 유령작가입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11144890)의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가 떠올랐다. 위장결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편은 이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기에,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이 시기에 작가는 <꾿빠이, 이상>이라는 책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그리고 버클리에 관한 글을 보면서, 금문교가 있은 샌프란시스코, 주로 머물렀던 산호세 등이 생각났다. 추억 돋는 글들.그러나 나머지 1/3은 조금 무겁고 어렵고 그랬다. "내 피를 물만큼이나 묽게 만들지 않으면"과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편은 문학의 국경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행기라기보다는 무슨 평론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는 글들. 작가가 아니기에 그만큼 공감을 할 수 없었다고 할까.여행기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닌 책이다. 웃음짓게 만들기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는 책이다. 그리고 책의 제목인 "여행할 권리"처럼 우리도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저 멀리 프랑스, 영국까지 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친일파가 다시 날뛰고 있는 이 시기에,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작가 김연수가 1999년 도쿄부터 2007년 미국의 버클리까지, 국경과 경계를 넘어 길 위에서 만나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산문집. 작품을 위해 중국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으며 취재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와 작가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독일과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산문집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김연수는 다른 장소를 여행하면서도 늘 문학과 소설에 대한 고민과 궁리의 끝을 놓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여행의 경험을 문학적인 고민과 삶에 대한 단상으로 연결시킨, 그의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의 세계가 잔잔하지만 밀도 있는 문장에 녹아들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어선 작가 김연수는 자신의 문학을 돌아보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인식하는 기회를 얻는다. 생생한 여행 현장과 현지인들의 삶의 기록, 문화적 차이와 문학적 고민을 재기 넘치게 풀어놓은 12편의 글들은 12편의 단편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줄 것이다.


깐두부만 먹는 훈츈 사람 이춘대씨
- 2004년 10월, 러시아 우스리스끄만 하루에 세 번

국경 너머 도끼로 이마까라 상들의 나라로
- 2005년 2월, 일본 나고야하고도 타지미하고도 카사하라

불싯, 쎄자르, 이 세상에 로코코코적인 건 없어
- 2005년 9월, 독일 밤베르크

아바, 내가 푸르미보다 진실되지 못한 밤비여서가 아니라
- 2005년 10월, 독일 밤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빅 웬즈데이를 만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
- 2006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신화 바깥도, 동방신기 바깥도 없는데, 너 지금 뭐 하니?
- 2006년 가을의 버클리와 2004년 봄의 옌지

나와 신국판과 멸치 사이에 흐른, 그 참으로 오랜 침묵
- 2003년 12월, 중국 지린성 룽징

봉쇄선 백오십리 너머에서는 익살스럽고 구슬픈
- 2006년 2월 중국 화뻬이셩 후쟈좡 마을

아마도 슬픔이거나, 혹은 20세기가
- 2006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내 피를 물만큼이나 묽게 만들지 않으면
- 2003년 9월, 서울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 1999년 8월, 일본 토오꾜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 언제라도 나를 매혹시킬 세 개의 공간